이 세상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

원제: この世の果てで恋を唄う少女~YU-NO~

제작사: elf(원작) Mages/5pb(리메이크)

발매 연도: 2017



  이전 어느 블로그에서 최근 에로게를 비판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텍스트 어드벤쳐를 게임으로 부를 수 있게 만드는 원인은 선택지에 있으며, 선택지를 고르는 것으로 분기를 만들어 하나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기 때문에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게임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바로 '플레잉', 체험일 것이다. 그래서 그 글쓴이는 단순히 준비되어 있는 구성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것은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체험이 배재된 결과이므로 게임으로 부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선택지가 극단적으로 퇴화한 오늘날의 에로게는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론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내용이다. 에로게, 넓은 범주로 텍스트 어드벤쳐는 굳이 게임으로 남을 필요가 있냐고 묻는다면 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영화, 만화, 게임 등 여러가지 범주의 '표현 양식'은 이야기의 서술을 위해 취하는 수단이지 알맹이인 이야기만 괜찮다면 게임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텍스트 어드벤쳐가 주는 그 느낌의 본질은 게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글과 그림, 음악이 어우러진데서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도 예외는 엄연히 존재한다. 나는 이야기만 좋으면 OK라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수단으로써의 퀄리티를 높인 결과 뛰어난 이야기를 보이는 작품도 엄연히 존재한다. 텍스트 어드벤쳐가 게임으로 존재하기 위해 발버둥 친 끝에 뛰어난 작품성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작품,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작품 <이 세상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다른게 아니라 시스템에 있다. 우리가 게임에서 흔히 사용하는 세이브&로드 개념을 시나리오 내에 녹여내고 활용해 냈다. 거기다 단순히 여기에 그치는 것만 아니라, 이 세이브&로드를 활용하여 게임 내 문제를 해결하도록 퍼즐을 구성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게임 오버'가 없는 이 작품은 세이브&로드를 반복하여 사건의 진상을 더듬어 나가는 어드벤처 '게임' 형식을 띄고 있다.


  세계관 역시 이러한 요소들을 반영하기 위해 짜여져 있으며, 오늘날에는 다소 흔한 소재인 '병행 세계'라는 개념을 96년도에, 그것도 게임 시스템 및 시나리오에 완벽하게 녹아들게 반영했다는 점은 굉장히 인상적인 부분이다. 오늘날 병행 세계를 다루는 작품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특히 일본 게임, 텍스트 어드벤쳐라면─ 선구자적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에로게 시나리오 라이터가 YU-NO를 감명 깊게 플레이했다고 공언하고 있기도 하고.


  병행 세계를 녹여낸 세계관과 시나리오, 시스템 3박자로 굉장히 임팩트 있는 작품이고 오랜 시간동안 에로게의 왕좌에 군림한 작품인 만큼 뛰어난 작품이나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먼저 아쉬웠던 부분은 후반부 전개가 너무 불완전 연소했다는 느낌이었는데, 당초 기획상으로는 이세계편 진입까지가 서장에 해당하고 이세계편을 본편으로 만드는 기획이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상 이게 엎어지고 현재의 구성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 작품의 후반부는 너무 맥빠진다.


  실제 병행 세계를 수없이 넘나들었던 현세편과는 달리 이세계편은 일자 진행이고─정말 이 게임 답지 않은 부분이었다─, 이야기 전개도 현세편과 따로 논다는 느낌이 굉장히 강하다. 또한 최종 보스마저도 너무 허망하게 쓰러진다. 차라리 리플렉터 디바이스를 이세계편에서도 들고 현세편과 마찬가지로 여러 병행 세계를 넘나들며 사건의 진상을 더듬어나가 두 세계를 모두 구해내는 구조였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내지 않았을까─칸노의 인터뷰 상으론 기존 구성이 이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 풀지 못한 이야기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플레이어의 추측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 있는 최소한의 단서들은 다 두어 플레이어의 몫으로 남긴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리마 코다이 쪽은 적어도 이야기에 한 번은 등장시켜야 하지 않았을까.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지만, 1996년 제작이라는 시대상을 감안해보면 정말 시대를 많이 앞서간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20년이 지난 2018년에 와서도 인상깊은 부분이 많았으니, 최소 20년은 앞서간 작품이 아니었을까. 당시 플레이한 사람들은 당연히 청천벽력 같았을 것이다. 언젠가 당시 구성대로 완전판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작품이지만, 핵심 크리에이터인 칸노 히로유키가 세상을 타계했으니 아마 보기 힘들 것 같다.


  여튼 플레이하는 시간은 간만에 정말 즐거웠던 시간이었고, 이런 작품이 시대의 흐름에 파묻히지 않게 노력하고, 한국에까지 전해지도록 노력한 사람 모두에게 고마운 시간이었다. 다음에도 이런 작품을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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